심형래 실패담 인터뷰…그가 꺼내놓는 상처 “우뢰매 안 찍는다고 했죠”

서울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심형래 전 영구아트무비 대표/촬영 비즈리포트

비즈리포트 편집부(김용후 편집장, 이명섭 기자) = 심형래 감독을 최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동안 심감독의 사업 실패와 재도전 스토리를 인터뷰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흔쾌히 승낙했다. 잇따른 사업 실패와 영화 제작 좌절 등이 전해진 이후 별다른 근황이 전해지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심형래 감독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심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촬영자 이명섭 기자

심형래 감독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잘 나가는 유명 코미디언이자 영화 감독 겸 제작자다. 한때는 정부 차원에서 신지식으로 홍보했지만, 이후 그는 사업 과정에서 각종 논란에 휩싸이며 송사를 치렀고 파산선고 등 굴곡진 삶을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사업과정에서 몇가지는 그 스스로가 중대한 착오로 여기기도 한다. 영화감독으로서 예술적 성취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과연 이에 대해 옹호나 비판을 떠나서 그의 삶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런 것이다. 그는 별다른 도전을 하지 않아도 비교적 안락한 삶이 보장된 쪽이었다는 점. 도전하는 과정에서 깊은 절망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 도전에 대한 개별적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는 어떻게 절망을 견뎌왔을까. 한때 한 업계에서 정점을 찍어본 이가 나락까지 떨어져본 경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그가 재도전에 나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 걸까. 이에 대해선 그도 적잖이 할 말이 있으리라. 

청년 심형래를 놀라게 한 디즈니랜드..”코미디언이 무슨” 반응에 상처

개인적으로 심형래 감독 인터뷰에 앞서 수많은 사전 인터뷰 자료를 검토했는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의외로 단순한 것인데, 그가 왜 영화 도전에 나섰느냐다. SF불모지인 한국 영화 산업의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그가 밝힌 포부는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을 심 감독이 왜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이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애국심? 여러 동기 중 하나일 순 있겠으나 하필 제작자와 영화감독의 일을 택한 까닭으로 속 시원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개인적이고 근원적인 동기가 궁금했다. 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Q 심형래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사람마다 정말 다양할 겁니다.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키워드는 어떤 겁니까?

심형래 감독 : 도전과 시도 아닐까요. 데뷔 이래 제가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건 틀림없어요. 아시다시피 제 도전이 높이 평가받아서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됐고요. 2호가 안철수 전 대선후보입니다. 영화도 좀 여러 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많이 넣었죠. 영구와 땡칠이에서 “어린이 여러분 영구를 불러볼까요?” 하며 양방향 소통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도 제 아이디어였죠(웃음). 그런 새로운 시도가 다 사람들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Q 새로움은 코미디언으로서 본능이기도 하겠죠.

심형래 감독: 살아남기 위한 것이기도 했죠. 코미디언 데뷔 때부터 그랬어요. 제 데뷔가 1982년입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스타는 누가 뭐래도 이주일 선배님이었어요. 그 인기를 뛰어넘으려고 제가 여러 연구를 많이 했어요. 표정이나 움직임이나 새로운 슬랩스틱 연기를 고민했죠. 제가 연구하는 걸 사람들이 알아봐줬던 거겠죠. 데뷔 7개월 만에 인기가 이주일 선배님을 넘어섰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를 테면, 저는 동물연기를 시도했는데 그때만 해도 무슨 코미디언이 펭귄이나 파리 같은 걸 흉내 내느냐고 욕을 먹었다고요. 근데 그런 게 먹혔죠. 그게 예전엔 안 하던 거거든요. 새로운 걸 해보면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다들 기존 방식으로만 하려고 했죠.

자연스럽게 그의 데뷔 때로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갔다. 그의 말마따나 전에는 없던 동물 연기 등을 통해 그는 일약 스타가 됐다. 영구로 대표되는 극화된 바보 연기는 독보적인 캐릭터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새로움에 대한 강박과 필요를 인식하는 태도는 코미디언이라는 직업적 특성에선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흥미로운 점은 영화 제작 등 콘텐츠 영역 전반으로 익숙한 자신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이다. 그는 왜 코미디언으로 머물지 못했을까.

Q 왜 코미디언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까.

심형래 감독 : 본 게 너무 많았어요. 제 인기가 높던 1980년대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는데, 저만 당시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어서 해외 재외동포 위문도 있고, 촬영도 있어서 해외로 나갈 기회가 적지 않게 있었어요. 그때 해외서 본 게 디즈니랜드 같은 큰 테마파크예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고 생각도 못했는데 규모나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나 놀랍더군요. 완전히 압도당했어요. 테마파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하려면 캐릭터 같은 것도 만들어야 하니까 영화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들 해외 경험이 없을 때 제가 먼저 눈을 뜬 거죠. 코미디도 크게 보면 콘텐츠 사업인데,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이런 얘기를 하면 코미디언이 무슨 그런 걸 만들 수 있느냐고 했죠. 다른 사람들은 테마파크를 상상도 잘 못하더군요.

그는 실제론 당시엔 드물게 해외견학 등을 통해 콘텐츠 시장에 대한 이해 폭이 넓었다. 그럼에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바보 연기를 하는 우스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는 이런 선입견과 코미디언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이 그 시대의 한계였다고 했다. 그가 가진 콘텐츠 트렌드 변화에 대한 식견이나 견해는 보통 시덥잖은 이야기 정도로 여겨졌다. 그는 항상 우스운 연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을 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질 않은 것이다.

이는 심각한 괴리였다. 그는 인기가 절정을 구가할 당시 4년 연속으로 연예인 소득순위에서 1위를 기록했다. 1985년 한 소년 잡지에서 조사한 인기 연예인 순위에서도 1위를 기록했는데, 조용필, 최동원, 전영록 등 당대의 인기인들을 제친 순위였다. 그럼에도 그를 소비하는 방식엔 존중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 영역에서 정점에 올랐지만 마땅한 존중이 따르질 않았다. 80년대 실제 소득 등으로 나타나는 그의 위상과 바보 연기자로만 인식되는 이미지 간의 괴리는 야심만만하던 심형래를 상처입히기 쉬운 구도였다.

심 감독은 1980년대 한때 연간 120억 원을 벌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코미디언을 하찮게 보는 풍토를 극복하긴 어려웠다. 1980년대 롯데제과 광고.

1980년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한 콘텐츠 제작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떠올린 심형래 감독 일화 한 토막. “심형래 감독 어머니가 우뢰매를 보면서 우는 걸 봤죠. 우리 아들이 바보 연기만 하다가 하늘을 날아 다닌다면서요. 바보 연기만 하는 심형래를 영화에 출연시켜준 덕분에 본인의 주가나 위상이 올라갔죠.” 이 한 마디에서 심형래 감독을 바라보는 당시 인식 수준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 심 감독은 “내가 그때 이미 최고 스타였는데 누가 누굴 키웠다는 건지…”라며 이와 같은 증언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심형래 감독 : 누가 절 키웠다든지 그런 말들 하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사실 그런 말들 때문에 서운했지. 솔직히 제가 서운하다고 달래주거나 하지도 않아서 더 상처 받았고요. 영화 쪽에서 제가 다른 사람들이랑 작업 안 하고, 직접 나선 것도 그런 이유도 있어요. 제가 직접 혼자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죠.


그는 자신의 이미지와 캐릭터가 중요한 자산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로선 당대 최고의 바보 연기자라는 이미지를 고수하면서도, 콘텐츠 제작자로서 자신의 이미지 한계를 탈피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둘은 어느 지점에선 상충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영리하게 풀어내기란 쉽지 않은 과제였다. 그는 우선 자신의 이미지를 고수하면서도, 제작과 연출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하는 방식으로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1985년 KBS 쇼비디오자키 방송 화면. 당시 위아더월드 패러디 영상을 만들었는데 심형래는 단연 최고의 가수 마이클 잭슨 역으로 분했다. 데뷔 4년차 그의 위상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는 차츰 변신을 시도한다. 우선 그는 돌연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우뢰매의 후속작 각본을 거부했다. 1989년이었다.

심형래 감독 : 우뢰매 제작사 측에 반감이 있었죠. 제가 우뢰매를 5편까지 찍었는데, 저를 존중한다는 느낌을 못 받았어요. 제가 아이디어도 많이 내고, 와이어 매달고 액션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도 그걸 모르고 저를 키워준다는 식으로 대하더군요. 사실 우뢰매의 인기는 코미디언 캐릭터 인기에 힘입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상처가 됐죠. 슈퍼 홍길동이라는 작품의 배우도 저한테 말도 없이 중간에 바꾸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제가 화났던 이유가 또 있습니다.

Q 다른 이유 말입니까?

심형래 감독 : 우뢰매 5편까지 제 출연비가 1000만 원이었습니다. 차기작은 출연료를 500만 원 더 인상하기로  합의했죠. 그땐 직접 출연료를 사무실에서 받아갈 때예요. 저는 미국에 공연이 있어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어서, 대신 제 어머니가 출연료를 받아 가기로 회사 측과 이야기를 마쳤죠. 출연료를 받기로 한 날. 어머니가 해당 제작사 사무실에 오전 9시부터 찾아갔는데, 오후가 되도록 이를 받지 못하고 결국 빈 손으로 돌아오셨다더군요. 출연료 인상 결정이 늦어졌던 건데…. 그렇다해도 어머니가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 한참이나 자리만 지키다가 돌아왔을 생각을 하니 화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이미 저 없이 우뢰매 촬영을 들어갔던 때인데, 저는 제 영화를 하겠다며 출연을 거부했죠.

Q 그래서 정말 다른 영화를 만드셨습니까?

심형래 감독 : 그땐 여름방학이 제일 중요한 개봉 시즌이었는데 이미 5월이 넘어가서 일정이 빠듯했어요. 그래도 제 코미디 캐릭터를 잘 살리면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당시 코미디 작가이던 장덕균 씨와 머리를 맞대고 3일만에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촬영은 남기남 감독과 며칠만에 끝냈죠. 총 제작기간 일주일이었습니다. 제 머릿속엔 우뢰매를 꺾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영구와 땡칠이’다. 해당 시나리오는 우뢰매 제작사의 라이벌인 대원동화가 제작했다. 당시 그는 러닝개런티 개념을 요구했는데, 심 감독에 따르면 당시 그가 받은 출연료는 2억 원에 이르렀다. 톱배우 출연료가 2000만 원 선이었을 무렵이었다.  

‘영구와 땡칠이’는 그해 최고 상영작이었다. 해당 작품은 당해 최고 관객(비공식 추산 180만 명)을 들인 영화로 알려져 있다. 영구로 대표되는 심형래 캐릭터의 파워는 여느 지적재산권(IP) 이상이었다. 이는 그에게 캐릭터의 중요성은 물론이고, 캐릭터 기반의 콘텐츠 사업에 대한 확신을 심어줬다. 자신의 캐릭터와 아이디어가 핵심 자산이라는 점을 그는 이 시기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확실한 킬러콘텐츠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기도 했다. 심 감독이 가장 중요한 흥행 포인트였고, 우뢰매의 추락과 영구의 도약을 통해 그점이 확실해졌으므로, 더 이상은 제작사에 목매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의 입김이 커졌다. 그는 이제 직접 제작과 연출에 뛰어든다.      

그리고 직접 제작 및 연출을 통해 바보 연기자 이미지를 차츰 교정해나갔다. 그는 진정으로 존중을 바란 예술인이었다. 이점은 뒷날 행보를 보면 보다 확실해진다.(해외 진출이며 글로벌 배우 섭외 등등… 그의 작품 활동엔 인정 욕구가 저변에 깔려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그는 어린이 동화류에 머물지 않았다. 대원동화와 서울동화로 대표되는 어린이 영화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세계였다.

영구와 공룡 쮸쮸.

이쯤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그의 작품 세계 또한 코미디에서 따온 캐릭터의 테두리와 만화적 상상력에서 기원한 것이다. 훗날 그의 작품들(예컨대 1995년작 ‘파워킹’ 등)을 보면 이에 대한 한계에 갇혔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절묘하게도 스스로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할 만한 컨셉을 찾았다. 아니, 그를 찾아왔다. 바로 헐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이다.

쥬라기 공원은 묘하게 그가 추구해온 캐릭터 작품들과 맥을 같이 한다. 이를테면 일본식 전대물(우뢰매)을 기반으로 영화 연기에 발을 들인 그가, 일본식 괴수 영화 문법을 다루는 것은 비교적 익숙해 보였다. 콘텐츠 재생산의 덫에 갇힐 수밖에 없던 그가 자신의 지향점을 헐리우드식 SF로 절묘하게 전환한 것이다. 쥬라기 공원은 그 단서였다. 그는 이제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되는 어엿한 혁신산업으로 자신의 작업을 자리매김할 근거를 찾은 셈이다.  

이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를 테면 영구와 땡칠이는 동서양 오컬트 요소(처녀귀식, 드라큘라, 강시와 좀비) 등을 경계없이 받아들인다. 동양과 서양식 콘텐츠로 구분되는 경계를 무화하는 지점이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동서양 콘텐츠를 모두 소비해온 한국적 서브컬쳐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국식 서브컬쳐 심성에 전대물의 감성, 헐리우드식 SF를 빠르게 저항없이 빠르게 흡수해온 것이다. 한국 문화산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표현된 것이 한국 게임개발사 등이 강점을 보이는 MMORPG 게임(한국식 게임 이미지는 서양풍이나 일본식 작화를 거침없이 뛰어넘거나 통합한다)들이다. 반면 한 분야에 대한 철학적 인식 기반이나, 집요함은 떨어져 보일지도 모른다. 심 감독의 낙차는 거기서 왔다. 그 혼합적 상상력의 과감함이 아니었다면 용가리식 SF는 시도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었다. 한편으로 한 장르에 대한 집요함은 떨어질 수 있어 위태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90년대 말 영화 용가리를 통해 SF 영화의 새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도전 정신은 IMF 극복에 단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신지식인 1호로서 우리 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2007년 ’디워’로 성공가도를 이어갔다. 그러나 사업적으로 휘청거렸다. 특수효과에 막대한 제작비를 들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제작에 나선 작품이 흥행에 참패한 탓이다. 그는 사업가로서 구설에 휘말리면서  제작사는 2011년 문을 닫았다. 그의 재산도 대부분 경매 처분됐고, 2013년엔 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추락이었다.

최근 그의 근황은 어떨까. 그는 테마파크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투자자를 모집한다고 했다. 실현 가능성이 어느 정도일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그는 그런 반응에 대해서 개의치 않는다고 답했다.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것은 그가 실패 이후 떨어진 명성과 좌절을 견디는 방법이었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성취와 평판 등과는 무관하게, 최고의 정점을 찍은 사람이 무너질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잘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고. 어쨌든 그는 마당극 등 그동안은 잘 나서지 않던 무대로 돌아왔다. 큰 좌절을 마주하고 자신이 가장 자신있는 일로 돌아가면서 어쨌든 용기를 얻고 있다고 했다. 그가 구상하는 테마파크 실현을 위해 자금을 마련하는 용도도 있을 것이다. 좌절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잘 하는 일을 떠올리면서 버텼다는 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굼뱅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말을 많이 생각했어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에서 재기하면 된다고요.”

그의 과오와 실패 과정에서 벌어진 문제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깊은 좌절의 늪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을 떠올리면서 용기를 얻는 것은 중요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인간은 버텨야 하는 존재니까. 그 사이 그가 보람있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신과함께’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이 ‘디워’를 한국영화 특수효과의 명실상부한 시작으로 꼽은 것이다.

“아는 사이가 아닌데, 그렇게 인정해주니 고마웠어요. 헛된 일은 아니구나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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